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속된 표현이 있다. 더 큰 세상을 경험하는 게 좋다는 뜻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면, 시야도 넓어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보고 느끼는 게 많아진다. 그 속에서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한기윤 EASL(동아시아 슈퍼리그) 한국 대표(이하 한기윤 대표)는 어릴 때부터 큰 세상을 경험한 인물이다. 농구계에 입문한 후에는 더 다양한 지역을 돌아다녔고, 다양한 업무를 해냈다. 그러면서 다양한 지식과 다양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가 걸어왔던 인생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인생을 통해, 넓은 세상의 중요성을 KBL과 KBL 팬들에게도 심어주려고 한다.
PART 1 : 미국
한기윤 대표의 유년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한기윤 대표는 ‘해외’라는 단어를 체감하기 힘들었던 1980년대에 미국 생활을 했다. 초등학교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다.
미국의 일상에 빠질 수 없는 게 ‘스포츠’였다. 문화 자체가 스포츠와 밀접했고, 한기윤 대표 또한 자연스럽게 스포츠를 접했다.
‘농구’라는 종목을 알게 된 것도 그런 이유가 컸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농구와의 끈을 놓지 않았고, 농구는 그의 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됐다. 그런 이유로, 미국은 한기윤 대표의 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됐다.
미국은 언제 다녀오신 건가요?
아버지의 박사 학위 때문에, 가족이 다 같이 미국에 있는 캔자스시티로 넘어갔습니다. 제가 7살이던 1984년도에 넘어갔고, 11살이었던 1988년도에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LA 올림픽 때 갔다가 서울 올림픽 때 돌아왔죠.(웃음)
지금도 그렇지만, 미국은 그 때도 스포츠 중심의 문화가 형성됐습니다. ‘하는 스포츠’와 ‘보는 스포츠’ 모두 활발했죠. 제가 한국에 있었어도 스포츠를 좋아했을 수 있겠지만, 미국에서 생활한 게 스포츠를 좋아하게 된 큰 요인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있던 캔자스시티는 당시 야구(메이저리그)와 농구(NCAA) 모두 잘했습니다. 야구는 1985년도에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캔자스 대학교 농구부는 1988년도에 우승을 했습니다. 그래서 스포츠에 관한 기억이 더 크게 남는 것 같아요.
농구를 특별히 좋아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사실 어릴 때만 해도, 농구를 특별히 좋아한 건 아니었습니다. 모든 스포츠를 다 좋아했어요. 야구 시즌 때 야구를 보고, 농구 시즌 때 농구를 봤죠. 다만, 미식축구는 다른 종목만큼 좋아하지 않았어요. 캔자스시티에 있는 팀이 잘 못했거든요.(웃음) 그렇게 본다면, 어느 스포츠를 먼저 접하고 해당 스포츠에 얼마나 감정 이입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에 들어온 후, 대한농구협회(현 대한민국농구협회) 명예기자와 농구전문잡지 점프볼의 객원기자를 경험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후, 농구대잔치를 많이 봤습니다. 그렇지만 KBL을 많이 보지 못했어요. 입대 직전만 해도, KBL 중계를 하던 케이블 방송이 저희 집에 나오지 않았고, 그러면서 KBL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거든요.
그렇지만 스포츠 기자를 직업으로서 염두에 뒀습니다. 2001년에 군에서 제대한 후 대한농구협회에서 명예기자를 선발한다는 글을 우연히 봤고, 지원 후 합격을 했어요. 대학농구와 고등학교 농구 대회를 취재했고, 취재한 결과를 대한농구협회 홈페이지에도 올렸죠.
그러면서 점프볼에 있던 손대범 국장과 안면을 텄습니다. 자연스럽게 점프볼의 객원 기자가 됐죠. 또, 당시에 루키에서 일하고 있던 박세운 기자와도 친분이 생기면서, 루키에서도 객원 기자를 했고요.

한기윤 대표는 대외 경력을 통해 ‘스포츠 기자’라는 꿈을 키웠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했다. 그 때, 한기윤 대표를 고민하게 하는 일이 발생한다. 인천 전자랜드(현 대구 한국가스공사) 프로농구단 통역 제의였다.
고민했다. 그리고 선택했다. 선택의 결과는 전자랜드 농구단의 통역. 선택을 한 한기윤 대표는 7년 동안 통역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다.
7년.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다. 다양한 걸 배우고 많은 걸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한기윤 대표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다양한 스타일을 경험하고, 다양한 분위기를 경험했다”가 통역 시절에 얻은 결론이었다.
통역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아마 2005년도였을 거예요. 취업을 준비하는 와중에, 손대범 국장한테 연락을 받았습니다. “전자랜드 농구단의 통역을 할 생각이 없냐?”고요. 그렇지만 고민이 컸어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죠.
그렇지만 지원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제이 험프리스가 감독을 한다는 게 크게 작용했어요. 제가 만약 통역을 하게 되면, 험프리스 감독님으로부터 NBA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험프리스 감독님은 팀을 어떻게 훈련시킬까? 전술을 어떻게 짤까?’라는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고심 끝에 지원을 했고, 최종 면접에 합격했어요. 그렇게 통역을 시작했습니다.
외국 선수 그리고 외국인 감독과 함께 했습니다. 업무량이 상상 이상이었을 것 같습니다.
엄청 많았습니다.(웃음) 다른 팀 같은 경우에는 통역만 하면 되는데, 저는 감독님과 함께 움직여야 했습니다. 외국인 감독님이다 보니, 저를 통하지 않으면 선수단 업무에 관한 소통이 전혀 안 됐거든요. 다른 팀과 트레이드를 시행할 때에도, 미리 알 수밖에 없었죠.(웃음)
선수단 일정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보통 감독님과 매니저가 함께 짜는데, 험프리스 감독님 같은 경우에는 제가 같이 있어야 했습니다. 인터뷰를 할 때 따라가는 건 당연했고요.
배우는 것도 많았을 것 같아요.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외국인 감독님과 함께 해서인 건 아닙니다. 그저 험프리스 감독님의 농구와 지도 스타일을 접했다는 게, 의미라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전자랜드에서 7년 동안 일을 하셨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어떤 거였나요?
솔직히 어떤 게 가장 인상적인지는 모르겠어요.(웃음) 하지만 전자랜드에서 다양한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아마 정규리그 2위부터 10위까지 모두 해봤을 거예요. 다양한 분위기를 경험했다는 게 저한테 큰 자산으로 다가왔습니다.
또, 저는 최희암 감독님과 박종천 감독님, 유도훈 감독님 등 다양한 지도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감독님마다 스타일이 다르셔서, 다양한 농구와 다양한 코칭 스타일을 접했죠. 농구에 정답은 없기에, 그런 다양한 경험들이 저에게는 고무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2012년에 통역을 그만 뒀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그 때가 35~36살이었을 겁니다. 장기적으로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어요. 직업을 바꾸게 된다면 언제 바꿔야 하나라는 생각도 했고요. 어쨌든 빠르게 결정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TESOL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준비했죠. (그만두게 된) 큰 이유는 없었던 것 같아요.

한기윤 대표는 2012년에 전자랜드를 떠났다. 그러나 농구를 완전히 떠난 건 아니었다. 전자랜드 통역보다 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2013년부터 ‘대한민국 남자농구 국가대표팀 전력분석관’이라는 직함이 생긴 것.
통역과 전력분석관. 그 차이는 너무 컸다. 그러나 ‘농구’라는 큰 줄기가 있기에, 한기윤 대표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2013 FIBA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2014 농구 월드컵과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등 굵직한 대회에서 자기 몫을 다했다.
대표팀은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믿기 힘든 성과를 거뒀다. 2002 부산 아시안게임 이후 12년 만에 금메달을 획득한 것. 코칭스태프와 선수들 모두 팬들과 함께 감격을 누렸다. 한기윤 대표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대표팀의 감격을 만든 숨은 공신이었기 때문이다.
대표팀 전력분석관은 어떻게 맡으신 건가요?
이것 역시 손대범 국장한테 제의를 받았습니다.(웃음) “대표팀에서 전력분석관을 뽑는데 할 생각이 없냐?”고요. 저는 “선수 출신들이 분명 있을 건데, 내가 해도 되겠냐?”고 했어요. 걱정이 들었던 거죠.
근데 KBL과 농구협회가 그 때 귀화 선수를 찾고 있었습니다. 전력분석와 국제 업무를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을 원했어요. 그래서 손대범 국장이 “형이라면 두 가지 다 할 수 있지 않을까? 형이 한 번 했으면 좋겠다. 한 번 지원해봐”라고 했고, 저도 결국 대표팀 전력분석관에 지원을 했습니다. 합격 후에 업무를 시작했고요.
가장 어려운 건 어떤 거였나요?
통역과 완전히 다른 일이라고 하지만, 전자랜드에서 일을 할 때에도 전력분석 관련 영상 편집을 조금은 했습니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습니다.
다만, 전력 분석을 위해 많은 영상 자료가 필요한데, 그런 영상 자료를 구하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특히, 대표팀 관련 자료는 너무 부족했어요. 선수 개개인의 영상은 어느 정도 있지만, 대표팀 전체 영상을 찾는 건 더 어려웠어요. 필리핀과 이란, 중국과 일본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또, 대표팀 같은 경우, 감독이 자주 교체됩니다. 새로운 감독이 오면 새로운 스타일을 구사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비해야 해요. 그런 것들이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마침 2014 농구월드컵 때, 이란과 필리핀도 함께 나갔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경기를 할 때, 저는 이란과 필리핀의 경기를 찾아갔어요. 거기서 이란과 필리핀에 관한 영상을 담을 수 있었죠. 그 점은 다행스러웠어요.
과정은 어려웠지만, 결과는 최상이었습니다.
냉정히 이야기하면, 우리 나라는 금메달 후보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거고, 열심히 준비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강호들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고민을 계속 했죠.
어려움이 큰 건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코칭스태프가 계속 준비하고 고민했고, 선수들이 모두 열정을 보였습니다. 최고참인 (문)태종이형이 너무 열심히 해줬고, (김)주성이(현 원주 DB 코치)와 (양)동근이(현 울산 현대모비스 코치) 등 고참들이 중심을 잡아줬습니다. (조)성민이와 (양)희종이, (김)태술이 등 중참 자원들도 잘 받쳐줬고, (김)종규와 (이)종현이 등 어린 선수들도 다들 열심히 했습니다. 그게 좋은 결과로 나왔다고 생각해요.
대표님에게도 ‘금메달’은 남다른 의미일 것 같습니다.
대표팀에 지원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유재학 감독님께서 어떤 스타일의 농구를 하시는지 궁금했고, 그래서 유재학 감독님의 농구를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습니다.
두 번째는 전자랜드 시절 우승을 해보지 못했니다. 이번 대표팀에서 그런 성과를 누려보고 싶었습니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열심히 해줘서 금메달을 획득했고, 저 역시 허전했던 뭔가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웃음)

대표팀 전력분석관을 수행한 한기윤 대표는 2015~2016 시즌 다시 코트로 돌아왔다. 2015~2016 시즌부터 고양 오리온의 통역을 맡은 것. 해당 시즌 오리온에서 KBL 우승 트로피를 처음으로 획득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KBL 우승, 두 마리 토끼를 사냥한 흔치 않은 인물이 됐다.
그러나 한기윤 대표는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나섰다. 자신이 지닌 강점과 열정을 살려, EASL의 일원이 됐다. 한국 대표로서 동아시아를 하나로 묶는 농구 리그를 기획하고 있다.
다만, EASL은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은 리그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 막막함과 두려움이 크다. 그러나 한기윤 팀장은 이를 ‘기대’와 ‘설렘’, 두 가지 단어로 치환했다. 이는 한기윤 팀장의 ‘NEXT CHAPTER’와도 연관이 됐다.
EASL에는 어떻게 합류하신 건가요?
대표팀 전력분석관을 마친 후, 2015년부터 고양 오리온의 통역을 맡았습니다. 2015~2016 시즌 종료 후, NBA 섬머리그에서 외국 선수를 보고 있었죠.
알고 지내던 NBA 스카우터 한 명을 섬머리그에서 만났습니다. 그 친구가 “아시아 프로 팀을 대상으로, 챔피언스리그 같은 대회를 구상하는 이들이 있다. 한 번 만나보겠냐?”고 제안하더라고요. 제안을 받아들였고, 당시 EASL측 관계자들이 ‘슈퍼 8’과 ‘터리픽 12’ 등 컵대회 형태의 대회를 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자리를 통해, EASL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맷 베이어 EASL 대표이사가 2018년 1월인가 2월에 한국으로 왔습니다. 저에게 “함께 일하면 좋겠다. 나와 정식으로 일해보자”고 하더라고요. 그 제의를 받고, 그 때부터 EASL 관련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EASL만의 특수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슈퍼 8’과 ‘터리픽 12’를 개최했지만, 저희의 궁극적인 목표는 ‘동아시아 슈퍼리그(EASL)’였습니다. 홈 앤 어웨이 형태의 클럽 대항전, 축구로 치면 AFC(아시아 챔피언스리그)가 저희의 지향점이었던 거죠.
하지만 처음이었기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우선 저희 EASL과 각 나라 간의 관계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슈퍼 8’과 ‘터리픽 12’를 먼저 개최했고, 두 개의 대회를 통해 각 나라들의 연맹과 신뢰 관계를 구축했습니다.
지금은 모든 연맹들과 협약을 맺었습니다. EASL을 위한 준비 작업도 끝났어요. 다만, ‘코로나 19’라는 변수가 있다는 게... 그렇지만 올해 10월에는 EASL을 개최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예측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셨듯이, 올해 10월부터 홈 앤 어웨이 형태의 EASL이 열립니다. 한국 농구에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우리 나라 선수들이 다른 나라 선수들과 정기적으로 시합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EASL를 통해 해외 팀들과 정기적으로 경쟁할 수 있고, 다양한 스타일의 농구를 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 리그마다 지닌 장점이 다르기에, 참가하는 팀들이 상호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해외 선수들과의 경쟁이 대표팀에 선발된 선수들에게만 주어진 기회였다면, 이제 그런 기회들이 더 넓게 퍼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대회를 준비하는 저희 EASL과 참가하는 구단 및 선수들 모두 열심히 해야겠지만, 외연의 확장과 융합에 의한 발전이 가능해졌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1%라도 더 생겼다는 게 큰 의미라고 봅니다.
또, KBL은 긴 시즌을 치릅니다. KBL만 접했던 팬들이 시즌 중간에 열리는 EASL을 통해 다양한 구도의 스토리를 즐길 수 있을 겁니다. 그게 팬들한테 큰 의미가 있을 거예요. 스포츠에서 경기력이나 승패도 중요하지만, 결국 경기를 통해 발생하는 스토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아시아리그가 흥행하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요?
저희를 포함한 참가 국가의 연맹들이 마케팅 활동을 잘 해야 하고, 경기 안에서 스토리와 컨텐츠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간단히 말씀 드리면, 팬들이 즐길 수 있는 거리들을 많이 만들어야 해요. 팬들의 이목을 어떻게 집중시킬지 연구하고, 연구한 방안을 어떻게 실행할지도 연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경기력이라고 생각해요. 선수들이 좋은 경기를 해줘야 해요. 그렇게 해야, 리그별 라이벌 구도도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거든요. 그렇게만 된다면, 팬들의 관심이 더욱 커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농구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EASL이 신생 리그이다 보니, 각 리그를 응원하는 팬들이 아직까지는 자국 리그의 팀들만 알고 계실 겁니다. 처음부터 타 리그에 관심을 갖는 건 어려울 거예요.
하지만 저희는 최대한 좋은 경기와 좋은 컨텐츠를 팬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 준비를 철저히 하겠습니다. 저희 EASL을 많이 기대해주시고, 많이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제공 = KBL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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