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 & KBL 전설 간의 평행이론, 덕 노비츠키와 주비츠키

정병민 / 기사승인 : 2021-10-12 1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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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시대를 사는 두 사람의 운명이 같은 패턴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이론.

농구공을 잡기부터 은퇴하기까지 많은 공통점을 지니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빅맨. 필자는 이 두 선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을 평행이론으로 재밌게 소개해 보려 한다.

#1. 시작은 농구가 아니었다.

두 선수 모두 데뷔 이래로부터 리그 최고 수준의 기량을 유지했다. 레전드로 칭송받는 선수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탄탄대로를 밟아왔으리라 예상하지만 결코 아니다.

덕 노비츠키는 독일 국가대표 농구선수인 어머니와 핸드볼 선수인 아버지 사이에서 출생했다. 운동선수 집안답게 노비츠키는 쉽게 구기종목을 접할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핸드볼과 테니스를 주로 하다 급격하게 체격이 성장한다. 이로 종목을 농구로 변환해 정식으로 시작하게 된다.

김주성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높이뛰기 선수였다.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높이뛰기 선수로서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 이후, 운동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김주성의 큰 키와 체격을 눈 여겨본 사람들이 많았다. 동아고 코치진은 김주성을 설득후, 스카우트에 성공. 비록 다른 선수들에 비해 늦게 시작한 엘리트 농구였지만, 주변의 전폭적인 지원과 본인의 피나는 노력 끝에 대학 무대를 초토화했다.

#2. 뛰어난 멘토

그들이 완벽한 선수로 완성되기까지 본인의 노력도 중요했지만, 뛰어난 스승의 영향도 크게 작용했다.

덕 노비츠키는 어린 시절부터 홀거 게쉬바인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만약 노비츠키가 그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노비츠키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게쉬바인더는 노비츠키의 내면적인 부분부터 농구 기술 그리고 그의 외적인 부분까지 모든 부분을 케어했다. 항상 그의 곁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게쉬바인더는 노비츠키의 농구 인생의 시작과 끝까지 동행했다.

게쉬바인더는 현재도 NBA에서 슈퍼 스타급 선수들을 도와 자세와 약점을 보완해 주고 있다. 많은 선수들의 뛰어난 스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많은 KBL 팬들이 알 듯이 김주성에겐 ‘농구대통령’ 허재가 존재했다. 허재는 김주성를 향해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사적인 부분부터 농구 관련 분야까지, 모든 부분을 조언해 줬다. 신인이었던 김주성은 출혈과 골절을 감수하고 경기에 출전하는 허재의 모습을 보고 그의 근성을 본 받고자 했다. 그렇게 데뷔 첫해 김주성은 허재와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3. 국가를 위한 헌신

노비츠키와 김주성 뛰어난 농구 실력을 바탕으로 어린 시절부터 국가대표에 발탁된다. 두 선수 모두 최소 10년이 넘는 기간을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나라의 명예를 드높였다.

노비츠키는 2002년 농구 월드컵에서 독일에 첫 메달을 안겼다. 2005년 유로바스켓에선 조국에 은메달을 선물하였지만 이후 미국, 스페인, 아르헨티나 등 쟁쟁한 농구 선진국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꾸준하게 조국의 부름에 응했다.

김주성도 17년이라는 긴 세월을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국위선양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일하게 2002 부산 아시안게임, 2014 인천 아시안게임의 멤버로 2개의 금메달을 가지고 있는 한국 선수이다. 

 



#4. 비슷한 플레이스타일

노비츠키와 김주성 모두 롱 투를 즐겨 쏘던 선수다. 3점 라인안에서 쏘면 모든 슛이 2점으로 환산된다. 그런 면에서 롱 투는 비효율적이라는 평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슈터 못지않게 정확한 슛으로 상대 수비수들을 당황케했다.

그들의 넓은 활동 범위에 팀은 스페이싱에 큰 장점을 가졌다. 경기를 좀 더 수월하게 풀 수 있었다. 심지어 큰 키와 뛰어난 기동성을 기반으로 한 수비 역시 출중했다. 공수 전반에 걸쳐 모자람이 없는 선수들이었다. 그래서 김주성에게 ‘주비츠키’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다.

노비츠키는 현재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유럽 출신 스트레치 형 빅맨을 향한 시선을 완벽히 바꿔 놓은 선수로 평가받는다. 미국 선수들의 독무대로 군림하던 NBA가 노비츠키의 성공을 본보기로 많은 유럽 선수들 자신감을 얻어 진출하고 있다. 실제로 그 후로 많은 선수들이 맹활약해 나가고 있다.


#5. 구단의 최전성기 BUT 충격적인 탈락

노비츠키와 김주성 둘 다 구단의 최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댈러스 매버릭스를 67승 15패로 팀 역사상 최고 승률을 기록했다. 그 기세를 몰아 팬들로 하여금 우승까지 기대하게 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를 만나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김주성의 원주 DB도 비슷하다. 동부 산성이라는 트리플 타워로 KBL 역대 최강의 팀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었다. 정규리그 44승 10패, 최다 16연승 등 KBL의 기록이란 기록은 다 갈아엎었다.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여론이 많았다. 하지만 챔피언 결정전에서 젊음과 패기로 무장한 안양 KGC를 만나 2:4로 패했다. 그렇게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감하게 됐다.

#6. 원클럽맨 그리고 영구결번

최근 NBA의 동향을 보면 우승이라는 목표를 위해 연봉을 삭감하고 팀을 주저 없이 옮긴다. 주변의 시선을 무시한 채 슈퍼팀을 결성해낸다 이러한 부분에서 노비츠키가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다. 댈러스 매버릭스에서 1988년 1라운드 9순위로 데뷔해 21년을 팀을 위해 몸 받쳤다.

그 기간 동안 10-11시즌에는 마이애미 히트를 꺾고 구단 역사상 최초의 파이널 우승도 달성해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해 다가오는 시즌 덕 노비츠키의 영구결번이 진행될 예정이다.

김주성 역시 02년도 데뷔 이후로 18년도까지 쭉 원주에서 선수 생활을 한 원클럽맨이다. 그가 존재하는 한 원주는 항상 우승후보로 군림했고, 실제로 많은 우승을 이끌었다. 원주 팬들 사이에선 우스갯소리로 김주성 선수 동상을 세워야 하는 게 아니냐라는 소리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원주 DB는 김주성의 마지막 시즌 은퇴 투어를 진행하는 등 끝까지 최고의 예우를 갖춰줬다. 그 역시 허재와 더불어 구단 2번째 영구결번 선수가 됐다.

 


 
#7. 최초의 기록

노비츠키는 NBA에서 두 개의 최초 기록을 가지고 있다. 번째는 위에서 설명한 21시즌 동안 한 팀에서 뛴 것이다.

두 번째는 비미국인 출신 최초로 3만 득점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노비츠키는 큰 키를 이용해 골밑 득점과 리바운드, 스크린 등 전형적인 빅맨의 역할에 충실했다. 더불어 정확한 미드-레인지 점퍼로 자신만의 무기를 갖췄다.

그의 학다리 점프슛은 지금까지 막기 어려운 슛이었다고 회자될 정도로 가히 사기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 다리를 들고 점프슛을 쏘기에 수비수가 앞에 있어도 일정 공간을 확보해낸다. 그 후 높은 타점과 정확한 슛으로 득점에 성공한다.

김주성 역시 1000블록으로 KBL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출중한 신장에 운동능력과 기동성도 뛰어났다.

그는 국내 선수와 외국 선수를 가리지 않고 매 시즌 상대해왔다. 한때 평균 2개의 블록슛 수치를 기록했다. 블록슛 1위라는 타이틀은 그가 은퇴하기 까지 김주성의 전유물이었다.

김주성은 블록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뛰어난 선수였다. 은퇴까지 10,288점(통산 3위), 3793개의 2점슛 성공(통산3위), 4425개 리바운드(통산4위), 1037블록슛(1위) 기록했다. 공수에서 맹활약했음을 보여준다.

2위의 기록은 찰스 로드의 601개다. 현재 KBL 무대를 뛰고 있는 라건아가 571개로 3위를 달리고 있다. 당분간 쉽게 깨지지 않을 기록은 분명하다. 그만큼 엄청난 기록이다.


두 선수는 리그의 전설을 뽑아보자 하면 꼭 거론되는 선수들 중 한 명이다. 각자의 팀을 항상 우승 후보로 빛나게 해준 북극성 같은 존재였다.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사진 제공 = NBA Media central , KBL

본문 사진 = 덕 노비츠키(첫 번째), 김주성(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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