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기본기에 충실했던 선수, 박훈근 부산중앙고 코치

손동환 기자 / 기사승인 : 2022-01-26 09: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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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웹진 2021년 12월호에 게재됐다. 본 기사를 위한 인터뷰는 2021년 11월 25일에 진행됐다.(바스켓코리아 웹진 구매 링크)


기본(基本). ‘사물이나 현상, 이론, 시설 따위를 이루는 바탕’이라는 뜻이다. 사전적 의미를 놓고 보면 그렇다.
모든 사람들이 ‘기본’을 강조한다. 모든 사람들이 ‘기본’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밑바탕을 단단히 다져놓으면 쉽게 무너지지 않고, 단단한 밑바탕이 있어야 다양한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코칭스태프와 모든 선수들이 ‘기본기’를 강조한다. ‘기본기’를 갖춘 이들은 코칭스태프의 신뢰를 받고, ‘기본기’를 갖춘 이들만이 큰 무대에서 제 몫을 해내기 때문이다.
박훈근(부산중앙고 코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수 시절 화려함을 지닌 이는 아니었지만, 탄탄한 기본기로 팀에 보탬이 됐다. 그렇기 때문에, 14시즌 동안 프로 무대에서 생존했다.
본인 스스로 ‘기본기’가 핵심 생존법인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기본기’를 더욱 강조했다. 인터뷰 중 가장 많이 나온 단어 역시 ‘기본기’였다. 그 정도로, ‘기본’은 박훈근에게 중요한 단어였다.

CHAPTER 1 : 농구대잔치 세대, 프로 무대에 뛰어들다
1990년대는 한국 농구의 최전성기였다. 문경은(전 서울 SK 감독)-이상민(현 서울 삼성 감독)-전희철(현 서울 SK 감독)-김병철(현 고양 오리온 수석코치) 등 농구대잔치 주역들이 인기를 몰았고, ‘슬램덩크’와 ‘마지막 승부’ 등 농구를 배경으로 한 만화와 드라마가 농구 인기에 기름을 부었기 때문.
박훈근 역시 농구대잔치 세대 중 한 명이었다. 눈에 띈 건 아니었지만, 빅맨으로서 건실한 플레이를 했다. 고려대와 연세대의 라이벌 구도에 힘을 실었다. 덕분에, 한국 농구 최전성기를 함께 할 수 있었다.
1997년 2월. 한국에도 프로농구가 출범했고, 농구대잔치 세대들은 ‘프로농구선수’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박훈근 또한 마찬가지였다. 직업 의식을 더 많이 갖고 농구를 대했다. 꽤 오랜 시간 ‘프로농구선수’로서 활약했다. 개인 통산 593경기라는 적지 않은 경기에 나섰다. 경기당 평균 16분 7초 출전에, 5.1점 2.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KBL이 1997년 출범했습니다. 한국 농구의 변화가 이뤄지는 시기였는데요.
프로농구 출범 소식이 들렸고, 먼저 출범한 팀들이 실업 팀에 있던 선수들을 지명했습니다. 제 기억에는 인천 대우 제우스(현 대구 한국가스공사)와 오리온(현 고양 오리온), LG 반도체(현 창원 LG)와 진로(현 서울 SK), 4개 구단이었을 거예요.
먼저 대우와 오리온이 92학번 형들(연세대 : 우지원-김훈-석주일, 고려대 : 전희철-김병철)을 선택했습니다. 대우가 연세대 출신 92학번 형들을 데리고 갔고, 오리온이 저희 학교 출신 92학번 형들을 선택했죠.
그리고 진로와 LG가 제 동기인 93학번들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권을 지닌 진로는 서장훈(은퇴)과 신석, 손규완(현 안양 KGC인삼공사 수석코치) 등을 영입했고, LG는 자동적으로 저랑 (박)재헌이, (양)희승이와 (박)규현이 등 제 동기들을 선택했죠. 김태진(명지대 감독)이랑 이상영(안양고 코치)도 데리고 왔고요.
프로 입단 소감은 어떠셨나요?
무조건 가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큰 느낌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프로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훈련도 환경도 그랬죠.
당시에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하루에 4번 운동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운동량이 엄청 많았죠. 당연히 그렇게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여러 팀에서 경기를 소화했습니다. 혹시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을까요?
(박훈근은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창원 LG에서 뛰었고, 2000년부터 2003년까지 고양 오리온의 전신인 대구 동양 오리온스에서 뛰었다.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대구 한국가스공사의 전신인 인천 전자랜드 소속이었고, 2006~2007 시즌에는 다시 LG로 돌아왔다. 2007년부터 3년 동안 서울 삼성의 유니폼을 입은 후, 2011년 고양 오리온의 전신인 대구 오리온스에서 은퇴했다)

많은 경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2001~2002 시즌 동양에서 우승했던 경기도 기억에 남죠. 그렇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09년 1월 21일 동부전입니다. KBL 역사상 처음으로 5차 연장전을 했죠. 비록 132-135로 지기는 했지만, 그 경기가 아직도 생생해요.
2010~2011 시즌 종료 후 은퇴하셨습니다.
2009~2010 시즌 후 삼성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오리온에서 한 시즌 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렇지만 나이가 있었어요. 또, 프로에서 많이 뛰었다고 생각했죠.
그런 것 때문에, 욕심을 더 내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우승을 함께 한 팀에서 은퇴했습니다. 유종의 미를 거뒀다고 생각합니다. 또, 1~2년 안에 사라진 선수들도 많은데, 저는 14년을 프로에 있었어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CHAPTER 2 : 지도자가 된 박훈근, 프로와 아마를 넘나들다
박훈근은 우승을 함께 했던 팀에서 은퇴했다. 하지만 제2의 인생이 곧바로 시작됐다. 박훈근의 모교인 고려대학교가 박훈근에게 코치를 제안했기 때문.
2011년 모교 코치로 부임한 박훈근은 당시 이민형 감독(전 대학농구연맹 부회장)-강병수 코치(현 수원여고 코치)와 함께 새로운 고려대를 만들었다. 고려대의 전력이 부족했던 시기였지만, 연세대와 정기전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일궜다. 그리고 2013년부터 뛰어난 선수들과 함께 고려대의 전성시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2014년. 박훈근은 선수 시절 후반부를 보냈던 서울 삼성으로 향했다. 수석코치 자격으로 삼성에 돌아왔다. 2015~2016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과 2016~2017 시즌 챔피언 결정전 진출에 공헌했다.
그 후 공백기를 겪었지만, 박훈근은 2020년부터 부산중앙고의 코치를 맡고 있다. 부산중앙고 역시 박훈근의 모교. ‘지도자 박훈근’은 그렇게 프로와 아마를 넘나들고 있었다. 그 속에서 많은 걸 경험했고, 많은 걸 느끼고 있었다.

은퇴 직후 고려대학교 코치로 부임했습니다.
지도자의 길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찰나에, 이민형 감독님께서 저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저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갔습니다. 학교 전력이 좋지 않을 때 들어갔기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나하나 만들 수 있었다는 게 좋은 경험으로 다가왔었어요.
코치님께서 계셨던 고려대는 매년 성장했습니다.
2011년에 정기전을 이기면서 흐름을 탔습니다. 그 후 포지션별로 좋은 멤버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포지션별 균형도 좋아졌죠.
단지 좋은 선수들만 데리고 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이민형 감독님과 강병수 코치님, 그리고 선수들과 함께 고려대 농구부의 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선수를 중심으로 할지, 선수들의 장점을 어떻게 활용할지도 고민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선수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프로입니다. 선수들이 프로에 적응을 잘하도록, 저희가 지도해야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선수 시절 경험을 토대로, 프로 구단에서 원하는 걸 선수들에게 알려주려고 했죠.
선수들 성향에 맞게 알려주려고 했어요. 이승현(현 고양 오리온)을 예로 든다면, (이)승현이 같은 빅맨도 요즘은 골밑과 외곽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속공 참가도 할 수 있어야 하고요. 그래서 승현이한테는 골밑과 외곽을 넘나드는 요령과 빠른 트랜지션(공수 전환)을 강조했어요.
당시 고려대가 잘했던 건, 선수들의 몫이 컸습니다. 선수들이 각자 포지션에서 부족했던 요소들을 메워줬거든요. 그래서 골밑과 외곽 모두 탄탄해졌고, 공수 전환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여러 긍정적인 요소가 결합되다 보니, 저희 학교가 점점 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2014~2015 시즌부터 서울 삼성의 수석코치로 활약했습니다.
이상민 감독님께서 새롭게 부임하셨습니다. 감독님께서 코칭스태프를 꾸려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 때 코치 제의를 받았고, 프로에서 처음으로 코치를 했습니다.
대학 선수를 가르치다가, 프로 선수를 지도하셨습니다. 차이가 컸을 것 같은데요.
고려대학교에 있을 때, 학사 일정 내에서 대학리그와 단일 대회를 준비했습니다. 준비 과정이 빠듯했습니다. 그리고 다들 학생 선수이다 보니, 마인드와 기술 모두 부족했습니다.
프로는 시기에 맞게 시즌을 준비합니다. 휴가와 체력 훈련 시기, 전술 훈련 시기가 정해져 있습니다. 운동 환경과 시스템 모두 체계적이죠. 프로에 있는 선수들의 마음가짐과 기술 또한 대학 선수들과 다르고요.
그리고 외국 선수의 역량이 부족하거나 주축 자원이 다치면, 전력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국내 선수와 외국 선수가 모두 갖춰질 때, 시너지 효과가 납니다. 프로에서는 그렇게 해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죠.
삼성에 처음에 갔을 때도 고려대 초반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갖춰진 게 많지 않았거든요. 그러다가 리카르도 라틀리프(2012~2013 시즌부터 KBL에서 뒨 라건아는 2017~2018 시즌까지 ‘리카르도 라틀리프’로 뛰었다)와 문태영, 주희정(현 고려대학교 감독)과 김태술 등이 합류했어요. 그리고 나서, 삼성이 플레이오프와 챔피언 결정전에 갈 수 있었죠.
2017년까지 삼성에서 코치를 한 후, 3년 정도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산중앙고등학교 코치로 부임하셨습니다.
중고등학생을 한 번은 가르쳐보고 싶었습니다. 한국 농구의 뿌리는 결국 아마추어니까요. 뿌리가 중요하기 때문에, 저에게도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모교인 부산중앙고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생각보다 힘들더라고요.(웃음)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완성되지 않은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코치님도 배우는 게 있을 것 같은데요.
저 스스로 의문을 품게 됐습니다. ‘이런 농구를 하겠다’는 큰 틀로 연구를 하는 것보다, 우리 선수들에 맞는 디테일한 연습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민 중 하나는 ‘우리 팀은 왜 수비가 안 되지?’였습니다. 그런 고민을 하다 보니, 우리 팀에 맞는 수비를 연구했습니다. 연습 방법을 이것저것 찾아봤습니다.
답은 결국 ‘반복’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모든 건 반복에 의해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선수들이기 때문에, 더 그런 것 같아요. 1~2번의 연습 만에 성장하는 건 없더라고요.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말씀드렸습니다.

CHAPTER 3 : ‘농구=희로애락’
위에서 이야기했듯, 박훈근은 지도자로 제2의 농구 인생을 살고 있다. 선수 시절과는 다른 관점으로 농구를 대하고 있다.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선수 시절 동안 깨닫지 못했던 것들도 배우고 있다.
그래서 인터뷰 말미에 더 진지했다. 기자는 그런 박훈근에게 “농구는 코치님한테 어떤 의미인가요?”라고 질문했다. 박훈근의 대답은 간결했다. “희로애락”이었다. 희로애락은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을 뜻하는 말. 즉, 인생에서 맛볼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뜻한다.
박훈근의 대답을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결론을 내리고 보면,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다. 필자가 내린 결론은 ‘농구는 박훈근의 모든 것’이었다.

‘선수 박훈근’을 돌아봐주세요.
저는 운동 능력이 좋거나 키가 크지 않았습니다. 프로에서도 대단한 선수가 아니었죠. 그렇지만 저는 프로에서 14시즌을 뛰었습니다. 저 스스로 왜 그렇게 오래 뛰었는지 의문을 품었죠.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기본기’였습니다. 기본기가 부족했다면, 프로에서 오랜 시간 뛰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색깔이 없다’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이 깔려있지 않다면, 선수 고유의 색깔도 나오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탄탄한 기본이 있어야, 선수 개개인의 특색이나 장점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저 나름대로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었을 때, 어린 선수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선수로서 기본적인 경쟁력을 갖추려고 했습니다. 체력과 투지부터 밀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린 선수들보다 더 많이 운동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어린 선수들과 비슷하게 움직일 수 있고, 경기 후에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저에게 주어진 길은 없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런 것들도 제 선수 생활을 오랜 시간 지탱해준 요소라고 생각해요.
‘기본’이라는 단어를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포지션별로 주어진 기본들도 있겠지만, 농구 선수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기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개가 있겠지만, 큰 기본 중 하나는 ‘농구 선수는 드리블을 할 때 땅을 보면 안 된다’입니다.
분명 드리블 기술이 화려해졌고, 선수들의 신체 조건과 운동 능력 모두 좋아졌습니다. 그건 고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화려한 드리블을 하더라도, 땅을 보는 선수가 많습니다. 정면 혹은 위를 봐야 어떤 플레이를 할지 정할 수 있는데, 땅을 보고 드리블을 하면 어떤 플레이도 할 수 없습니다. 한계가 있고, 내실 없는 농구를 하게 되죠.
그리고 수비가 강하게 붙을 때, 스텝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많은 선수들이 최근 들어 볼을 가진 채로 농구를 많이 하다 보니, 볼 없는 농구나 스텝을 활용하는 농구를 어려워합니다. 제자리에서 간결하게 농구를 할 수 있는데도, 위에 언급한 이유들 때문에 효율적이지 못한 농구를 하는 거죠.
양손을 쓰지 못하는 선수들도 많습니다. 왼손 레이업을 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왼손을 못 써서 오른손 레이업을 하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이런 상황은 프로에서도 심심찮게 나오는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1차적인 기본이라고 봅니다. 물론, 그런 기초적인 것들을 터득하는 것도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못한다’라는 말도 있지만,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기본기 훈련을 해야 합니다.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그러면서 모든 기본 기술의 성공 확률을 높여야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제가 올드하다고 느끼실 수 있습니다. 고리타분하다고도 느낄 수 있고요. 저 스스로도 그런 이미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을 갖추지 못하면, 프로에서 오래 뛰기 힘듭니다. 기본을 갖추지 못한 선수는 결국 남들보다 도태됩니다. 그래서 ‘기본’을 자꾸 이야기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농구’는 코치님한테 어떤 의미인가요?
‘희로애락’입니다. 농구로 인해, 기쁨도 슬픔도 겪어봤고, 여러 우여곡절들을 경험했거든요. 그리고 농구를 직업으로 삼은 지 20년이 넘었지만, 농구는 여전히 어려운 존재입니다.
마지막으로 ‘선수 박훈근’을 추억으로 삼는 분들한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10년 전에 선수 유니폼을 이미 벗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지도자 자격으로 코트에 서고 있습니다.
농구 팬들께서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큰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프로 선수들도 응원해주셔야 하지만, 결국 한국 농구의 뿌리는 아마추어 선수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 아마추어 선수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팬들께서 아마추어 선수들을 많이 독려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가르치는 선수들 모두 열심히 운동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 만큼, 좋은 결과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좋은 선수를 많이 육성할 수 있도록 열심히 지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제공 = KBL, 박훈근
일러스트 = 정승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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