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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코 인사이드] 잊혀진 인물들 - ‘비운의 천재’ 김학섭

[바스켓코리아 = 김영훈 기자] 등장부터 화려했다. 농구를 시작한 초등학교 때부터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중, 고등학교 때도 스타성은 감춰지지 않았다. 전주남중과 전주고를 이끌며 한국 농구의 차기 스타로 발돋움했다.

창창하던 농구 인생은 대학교 때 바뀌었다. 겪어본 적 없던 벤치 신세와 갑작스러운 무단 이탈. 밝았던 미래는 4년 만에 어두워졌다. 힘들게 프로에 진출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6년 만에 은퇴.

김학섭의 이야기이다. 최고 유망주에서 비운의 천재가 되기까지. 바스켓코리아는 김학섭을 만나 다사다난했던 스토리를 들어보았다.

※ 본 기사는 바스켓코리아 8월호 웹진에 게재된 글입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는 선수였다.
나는 솔직히 내가 농구를 어느 정도 하는지 몰랐다. 그냥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 내 기량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알지 못했다.

전주남중은 어땠는가?
중학교 올라왔을 때 동기에 박범재, 조성민과 같이 올라왔다. 멤버가 괜찮아서 우승도 많이 했다. 키는 작았지만 조직력이 좋아서 우승했다.

전주고등학교 때 기억은?
정휘량(전 안양 KGC)이 고등학교 때 농구를 시작하며 센터가 생겼다. 그리고 나는 가드로 넘어오면서 돌파랑 속공 플레이를 많이 했다. 백보드 3점도 자주 구사했다. 조성민, 박범재, 그리고 내가 거의 주축이었다.

청소년 국가대표에도 뽑혔다.
아시아 대회를 위해서 말레이시아로 갔다. 당시 선수들이 방성윤, 김일두, 정재호, 나, 정상헌 등이었다. 각각의 학교에 잘하는 선수들이 뽑히니 서로 개성이 너무 강하더라. 캐릭터도 다양하고, 득점 욕심이 강한 선수들이 많았었다. 개성이 다양한 선수들이지만 단합은 잘 되었다. 천정열 코치님이 엄하게 많이 가르쳐 주셨다. 결승에서 중국을 크게 이겼다.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새로운 친구들과 재밌는 경험이었다.

조성민 선수와 같이 한양대로 진학을 했다.
2학년 때 이미 여러 대학들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고려대와 한양대의 스카우트 제의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내가 어떤 위치였는지는 고등학교 2학년 나이로 몰랐다. 단순히 나는 고등학교 동기들과 같은 대학에 가고 싶었다.

대학에서는 저학년 때 벤치에 앉은 시간이 많았다.
대학교 가서 제일 힘들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항상 베스트5로 뛰었다. 내가 성장이 빨랐고, 기술도 좋았고, 득점력도 좋았다. 경기를 뛰면서 항상 주전이었다. 벤치에 앉은 적이 없었다.

대학교 가서는 내가 주전 선수보다 더 잘하는 거 같은데 나를 안 뛰게 해주더라. 마음이 얼마나 조급했겠냐. 그 때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4학년 때 갑작스러운 무단이탈 소식이 나왔다. 
그때 내가 무릎 왼쪽 십자인대를 다쳐서 몸이 좋지 않았다. 내가 계속 절뚝 거려서 치료받고 싶다고 감독님께 말했다. 다른 선수들은 부모님이 오셔서 말하는데 나는 부모님이 없으니 감독님이 안 보냈다. 너무 힘들었다. 한양대 다른 운동부 감독님들이 나보고 나가서 치료받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가 결심을 하고 무단이탈을 했다.

나가서 재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아내가 도움을 많이 줬다. 좁은 방에서 5개월 정도 재활을 했다. 병원 원장님한테 프로에 가면 재활비 드릴 테니 나을 동안 무료로 재활을 해달라고 말했다. 원장님도 흔쾌히 해줬다. 내가 프로에 들어가고 나서 인사드리고 갚았다. 너무 감사한 원장님이다.

재활을 하고 돌아온 대회에서 맹활약을 했다. 
팀을 잠깐 떠난 상태에서 한양대가 종별선수권에 나갔다. 그 때 2부 대학에 졌다. 난리가 났다. 김춘수 감독님이 나한테 직접 전화를 하셔서 2통의 음성 메시지를 남겼다. ‘네가 와서 유종의 미를 거뒀으면 좋겠다’라는 내용이었다. 여러 지인에게 물어본 결과 팀에 들어가는 게 낫다는 결론이 나와서 들어갔다.

마지막 대회인 농구대잔치에서 팀을 4강에 올려놨다. 
운이 없었다. 프로에 입단해서 우승해서 챔피언 반지를 꼈다. 다음 해에 (양)동근이 형이 상무를 갔다. 내가 이제 경기를 많이 뛸 시기였다. 그런데 KBL 제도가 바뀌어서 키나 영이라는 단신 외국인 선수가 들어왔다. 타이밍이 매우 안 좋았다. 

SK와 오리온을 거쳐 30세의 나이로 은퇴를 결정했다. 
계약 기간은 1년 남았었다. 아들딸이 있어서 결정을 일찍 하고 싶었다. 아내와 상의 후에 결정을 했다. 감독님에게 은퇴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빠른 시기에 은퇴를 했다. 나 자신에게 많이 화가 났었다. 내가 노력을 하지만 내 마음처럼 되는 것이 아니었다. 

코치로 전주남중을 갔다. 
처음에는 심판으로 가느냐와 지도자를 하느냐를 고민했다. 그래도 아들 딸이 있으니 선생님을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셔서 코치를 결정했다. 돌아보면 제일 재밌었던 시기가 중학교 때였다. 존경하는 은사님이 하셨던 지도방식을 하고 싶어서 전주남중으로 돌아갔다. 

10년 넘게 돌아왔다. 변한 것이 없었다. 선풍기 바퀴도 없어서 1학년들이 너무 힘들어했다. 공을 넣는 가방도 없었고, 비디오 분석 시설도 없었다. 내가 하나씩 다 만들었다. 운동기구도 만들고, 사고 했다. 지금은 남부럽지 않은 시설이다.(웃음)

지도방식만의 철학이 있을 것이다. 
내 철학은 내가 알고 있는 전술, 노하우를 다 알려주는 것이다. 시기적으로 성장이 안 된 선수들이다. 힘도 탄력도 없어서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알려준다. 다른 코치들이 알려줄 수 없을 수 있기에 나는 그냥 다 알려준다. 누구 한 명이 특출나서 팀이 꾸려지는 것보다 식스맨까지 골고루 득점하고 팀이 구성되는 것을 원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내 분이 인생에 큰 도움을 줬다. 
한양대에 올라온 뒤 20세 때 만났다. 내가 돈이 없었다. 부모님이 나를 지원할 상황이 아니었다. 아내가 밤에 도시락 싸와서 밥을 먹이고, 아프면 치료해줬다. 먹여 살렸다. 사회생활도 일찍 시작해서 고생을 많이 했다. 생명의 은인이다. 프로를 가면 이 사람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나보다 눈물을 많이 흘렸다.

앞으로의 삶의 계획은 무엇인가. 
프로팀이나 대학팀을 가고 싶은 마음도 있다. 아내도 어느 정도 원하고 있다. 농구와는 별개로 개인적인 사업도 병행하고 있다. 제주도에 테마 상가를 짓고 있다. 두 개를 모두 다. 앞으로 두 분야에서 노력할 계획이다.

※ 더 많은 기사를 보고 싶으시다면? ☞ 바스켓코리아 8월호 웹진 보기

사진 = 김우석 기자, KBL 및 본인 제공

김영훈  kim95yh@basket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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