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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체육 농구, 그 태동과 발전 그리고 현재②
2000년대 초반 활동했던 MSA 모습들. 현재까지 강 팀의 면모를 이어가고 있다.

[바스켓코리아 = 김우석 기자] 2010년대로 접어들며 ‘농구’는 많은 변화를 요구 받고 있다.

키워드 중 하나는 관람 스포츠와 참여 스포츠 형태의 변화다. 관람 스포츠로서 농구는 그 인구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반면, 참여스포츠로서 농구와 프레임은 양적, 질적 향상이 이뤄지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농구는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닐 정도로 관람 스포츠로서 많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2010년 대로 접어들어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전하고 있는 형국이다. 엘리트 선수가 2,000명이 조금 상회할 만큼 숫자도 줄어 들었다. 참여 스포츠로 농구를 즐기는 인구는 정확히 산출할 수 없지만, 적어도 20만 명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KBL과 WKBL에서 운영하는 유소년(녀) 클럽이 활성화 되어 있고, 교육부에서 실시하고 있는 중, 고등학교 스포츠 클럽 리그와 대학스포츠총장협의회에서 운영 중인 대학 동아리 리그, 마지막으로 문화체육관광부 주관으로 시행 중인 각 시도 별 리그 등에 참여하고 있는 농구 동호인 숫자는 적어도 20만 명을 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 만큼 건전한 신체 활동과 여가 선용의 일환으로 농구는 많은 국민이 즐기고 있다. 참여 스포츠로 가장 인기가 있는 축구와 등산 인구를 넘어서고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에 그 숫자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신년을 맞이해 생활체육 농구에 대해 알아 보는 시간을 갖는다. 두 번째 시간은 라이벌과 전국 대회 이야기다.

2000년대 중반까지 MSA와 쌍벽을 이뤘던 팀 토파즈.

MSA와 토파즈, 생활체육 라이벌의 역사적 탄생 

생활체육 농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두 팀이 있다. 바로 MSA와 토파즈다. 최근에는 아울스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MSA는 1999년 가을, 서울 휘문고 체육관에서 결성된 팀이다. 연세대 선수 출신 조재현과 동갑 내기 친구들이 모여 만든 ‘즐농’ 팀이었다. 덧붙이면 체대 입시 학원 사업을 위해 만들어졌다. MSA는 Master Sports Academy 약자다. 이후 Most Superior Amature로 의미를 바꿨다.

토파즈는 윤성모와 박성우, 정우인, 김성준 등 왕십리와 한양대 바닥 코트에서 농구를 즐기던 인물들 중심으로 탄생한 팀이다.

두 팀은 2000년대 중,후반까지 극강의 전력을 이어갔다. 서울,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개최된 대회에서 우승을 나눠가졌다. MSA가 다소 앞섰다. 당시 메이저 대회였던 김포금쌀배 등에서 두 팀은 늘 결승에서 만났고, 간발의 차로 MSA가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양 팀은 많은 메이저 대회에서 항상 결승전에서 만났고, 스피드와 열정에서 우위를 가진 MSA가 우승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MSA는 창단 멤버였던 조재현, 김우석, 김병석(현 KBL 심판), 문석진(현 WKBL 심판)에 이어 조현익, 김재호라는 당시 생활체육 농구를 주름잡던 이들이 합류하며 완벽에 가까운 전력을 구축했다.

이후 경희대 존 출신의 강희원과 강희기 쌍둥이 듀오가 합류했고, 경기대 요농 출신의 센터 홍민기, 수원대 콘돌 출신의 박희철에 이어 그의 동네 친구였던 건국대 아농 출신의 나윤혁이 합류하며 정점을 이뤘다.

2000년대 초반을 지나며 완전한 전력을 구축한 MSA는 전국 최강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생활체육 농구를 휩쓸었다. 참가하는 대회마다 우승을 차지했다. MSA는 현재까지 강 팀의 면모를 이어가고 있다. 20년 역사 속에 세대 교체가 이뤄졌지만, 현재까지 상위권 전력을 유지하고 있다.

조현익 회장의 공이 컸다. 당시 조 회장은 다양한 형태의 음주가무를 후원했고, 스타 크래프트를 통해 조직력을 배양하는 등 선수단 관리를 완벽히 해냈다. 생업이 존재하는 동호인 농구 결속을 다지기 위해 필수적인 부분이다. MSA가 오랫동안 똘똘 뭉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토파즈 멤버도 화려함 그 자체였다. 경희대 존 출신의 인사이드 박성우와 민완 가드 김민회를 시작으로 국민대 쿠바 출신 두 가드 정우인과 김상준 그리고 경기대 이슈 출신 고재필과 이요한이 존재했다. 연세대 출신 김세연이라는 걸출한 센터까지 합류했다. 

두 팀은 2000년대 후반까지 정상급 팀으로 군림했다. 그리고 각급 정상급 생활체육 대회 결승전에서 늘 맞붙었다. 불꽃 튀는 승부를 벌였고, 승패는 늘 늘 마지막 갈렸다. MSA가 근소하게 앞섰다.

활동량과 열정이 장점인 MSA와 세련된 농구를 펼쳤던 두 팀의 대결은 움직임에서 앞선 MSA가 간발의 차로 승리를 거뒀다. 경기 내용은 박진감 넘쳤고, 늘 두 팀 결과에 많은 관심이 쏠릴 정도였다. 토파즈는 많은 패배를 남겼지만, 가장 큰 대회였던 ABL 리그에서 MSA를 넘어섰다. 

그렇게 두 팀은 2000년 대 후반까지 생활체육 무대를 양분했다.

또, 생활체육 농구 최고의 블로커로 평가 받는 손용규를 앞세운 닥터바스켓도 존재했다. 손용규를 시작으로 ‘더 파이터’ 김정염(전 농구닷컴 대표)과 최경훈, 손종우라는 두 선수 출신이 있었다. 완성도 높은 팀이었다. 하지만 MSA와 토파즈를 넘어서진 못했다. 하지만 늘 상위권에서 맴돌았다. 두 팀을 제외하곤 어느 팀도 ‘닥바(닥터바스켓의 줄임말)’를 넘어서긴 쉽지 않았다.

양대 구도를 위협하는 다크호스들의 등장 

이외에도 적지 않은 강호 혹은 다크호스들이 존재했다. 신동경, 유정룡으로 대표되는 하모니베스트와 류동혁, 김진철 트윈타워에 서울대 SP 출선의 두 에이스 이장근, 장도완이 존재했던 SP히든 그리고 선수 출신 5명으로 구성된 플레이어에 장거리 3점슛 슈터 김도영이 존재했던 마이너스, 마지막으로 이용석, 육근조, 곽호준으로 대표되는 바스켓슈타인이 있었다.

이 팀들은 MSA와 토파즈를 위협할 만한 전력을 갖췄다. 하지만 쉽게 그들은 두 팀을 넘어서지 못했다. 2%가 부족했다.

또, 전통의 명가인 역풍과 페가수스에 메이저까지 상위권 그룹에서 활동했다. 세 팀은 앞선 팀 들에 비해 전력이 조금 약했다. 메이저는 2000년대 중반 당시 대회 중 가장 긴 기간(3월부터 11월 주말까지)을 치렀던 종로 YMCA 농구대회 동호인 부분에서 36연승을 거두며 3연패를 달성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 팀들은 2000년대 중,후반까지 맹위를 떨쳤다. 조금 일찍 전성기를 보낸 팀도 있지만, 대부분이 명맥을 유지하며 강 팀으로서 면모를 과시했다.

대구를 대표했던 플라이와 선발 팀. 3on3에서 더 좋은 모습을 남겼다.

지방에서 위력을 보였던 팀들 

수도권 이외에도 강 팀들이 존재했다. 인천에는 송농회가, 안산에는 안산용들이 있었다. 대전에는 박종용으로 대표되는 농구 사랑과 PK가 있었고, 대구에는 배중일, 양성훈, 김창훈이 존재했던 플라이가 있었다. 이들은 3on3 농구에서 더욱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나이키와 아디다스에서 매년 여름 3on3 농구 대회를 개최했다. 마케팅 차원의 활동이었다. 플라이는 많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명성을 떨쳤다.

부산에는 액션과 제백 그리고 스포츠 아트 같은 팀이 존재했다. 스포츠아트는 최근 40대부에서 좋은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전라남도 광주에도 강 팀이 있었다. 최근에는 ‘흙’으로 다시 뭉쳐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04년 전주 전국 대회 서울시 장년부 선발팀. MSA 조현익(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닥터바스켓 손용규(오른쪽에서 네 번째) 등이 보인다.

전국 대회 개최와 참가, 농구와 함께 추억을 

이 당시 매년 4번의 전국대회가 있었다. 두 번은 선발전 형식으로, 두 번은 시도 별로 접수를 받아 참가가 가능했다. 각 시도 선발로 나선 팀 들의 대결은 불꽃 튀는 접전의 연속이었다.

대축전과 문화관광부 장관기였다. 서울과 경기 그리고 부산, 대전 등이 각축을 벌였다. 많은 추억을 쌓는 계기도 되었다. 주말을 이용한 1박 2일간 일정 동안 선수단은 많은 즐거운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자리였다.

고성과 주먹이 오가기도 했다. 선수단과 심판진 사이 혹은 선수단끼리 충돌이 적지 않았다.

대회가 끝나고 나면 자주 전국농구연합회 자유게시판에는 불만 혹은 청원과 관련한 글이 올라오곤 했다.

하나의 이슈이자 재미였다. 새롭게 등장한 플랫폼에 대한 과도기적 시기였다. 현재는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 생활체육 농구 자체를 즐기는 문화 자체가 많이 성숙되었다.

선수층이 두터운 서울과 경기에서는 선수 선발과 관련해 많은 불만도 있었다.

2000년대 후반 서울시연합회 이사를 맡고 있던 한 인물은 대표팀 선발과 관련해 이권을 행사하는 진풍경도 있었다. ‘우리 대회에 나오거나 나와 친분을 쌓으면 서울시 대표로 선발해주겠다’라는 식이이었다. 그 만큼 당시는 대표팀 선발과 관련해 이권이 존재하기도 했다. 웃픈 이야기였다.

그렇게 생활체육 농구는 라이벌 구도와 나라 정책과 맞물린 외형 증대 속에 계속 성장했고, 2000년대 중흥기를 지나치며 2010년대를 맞이했다. 3부에서 계속

사진 제공 = MSA, 토파즈, 대구 플라이, 서울시 농구협회 

김우석  basketguy@basket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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