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켓코리아 편집팀) 1980년대 농구 대잔치를 빛낸 득점기계에서 금융감독원의 부산지원감독서비스 팀장에 이르기까지
인생에서 정말 극과 극의 삶을 살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있다. 바로 그 주인공은 금융감독원 부산지원감독서비스 팀장으로 재직중인 오동근 팀장.
1997년 프로농구 출범 이후 농구를 사랑하게 된 농구 팬이라면 다소 생소하게 들리는 이름일 수도 있지만, 오동근 씨는 농구 대잔치에서 ‘오빠 부대의 원조’로 불릴 만큼 빼어난 외모와 뛰어난 실력을 겸비한 선수였다.
특히 현대전자가 우승을 거둔 1983년 농구 대잔치에서는 3차대회 득점왕은 물론이고, 박수교, 이충희, 조동우, 이성원과 함께 BEST 5에 뽑히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러한 실력을 바탕으로 1984년에는 국가대표로 선정되기도 했다.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 오동근 씨가 소속되어 있던 한국은행팀은 다른 팀에 비해 객관적인 전력이 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선수만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오동근 씨가 전성기로 활약하던 시절에는 황유하, 진효준, 이충희, 이민현, 최철권, 박수교, 신동찬, 박인규, 김현준 등, 포지션에 상관 없이 슛에 관해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선수들이 많이 배출된 시대에 뛰었다는 것이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하지만 10년 남짓 실업팀에서 선수생활을 한 오동근 씨가 은퇴를 결심했던 당시 1990년 4월 6일자 경향신문(▶기사보기, 네이버 링크)에는 ‘오동근 소리없이 은퇴… 금융팀 명예 지킨 득점 기계’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갈만큼 그의 활약은 뛰어났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하고, 워낙 약했던 소속팀 때문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오동근 씨는, 선수가 아닌 한국은행 발권부 출납과 근무를 시작으로 은행원으로의 새로운 삶을 써 내려 간다. 그리고, 20여년 지금 지금은 농구 코트에서 못지않게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준수한 외모로 ‘오빠 부대의 원조’로 불렸고, 뛰어난 득점력을 앞세워 한국은행을 이끌었던 오동근 팀장을 바스켓코리아가 만나봤다.
은행 실업팀 선수 시절의 추억
추일승 (이하 ‘추’)> 선배님 반갑습니다. 요즘 근황이 어떠신지?
오동근 팀장(이하 ‘오’)> 은퇴한 이후 소속팀인 한국은행에서 근무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요즘은 금융감독원 서비스 팀장으로 일하고 있죠. 예전에 농구공을 잡을 때를 생각해보면,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셈이죠.
추> 제가 예전 선수로 뛸 시즌에도 선배님과 많은 연습을 했었던 것 같은데요. 당시에도 슛이 참 좋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참 막기도 어려웠고요. 특별한 비결이 있으신가요?
오> 특별히 비결이라는 것이 있을 게 있나요? (웃음) 대신 예전에 한국은행에 있을 때 매일 슛 연습은 참 많이 했어요. 제가 190cm에 82kg이었으니 당시 슈터치고는 키는 컸어요. 하지만, 체격이 호리호리해서 절대적인 신체적인 조건이 그리 뛰어났다고 볼 수는 없었죠. 그나마 큰 키 때문에 한양대 시절은 슈팅 가드를 보면서 센터까지 보기도 했죠. 지금 흔히 말하는 멀티 플레이어였던 셈이죠.
하지만,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슛도 연습을 많이 했고, 그 당시에 다소 변칙적인 슈팅 방법도 많이 개발했었죠. 아마 그 당시에 현대전자로 간 이충희, 삼성전자로 간 임정명, 기업은행이랑 산업은행으로 간 임기열, 윤철진 같은 친구들이 저랑 비슷한 시기에 실업팀으로 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친구들에 비해서 나도 뭔가 하나 정도는 잘 하는 게 있어야 했었거든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사실 내가 당시에 삼성이나 현대로 갔었더라면, 아마 더욱더 많은 득점을 올렸을 것 같다는 이야기는 주변에서도 많이 해요. 하지만, 현대나 삼성과 같은 실업팀을 갔더라면 은퇴 이후를 쉽게 장담할 수 없었어요. 쉽게 말해 직장이 보장 안 되는 거죠.
반면, 한국은행 같은 은행팀을 가면 은퇴 이후에도 은행원으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죠. 그래서 당시에 선수들이 은행팀을 택한 면도 없진 않았죠. 생각해보면, 한양대학교나 한국은행이나 당시 농구 무대에서는 큰 주목을 못 받는 팀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추> 본인의 활약에 비해서 팀의 성적이 나질 않아 힘드시거나 심리적인 부담은 없었나요?
오> 글쎄요. 한국 은행이라는 팀 자체가 아무래도 선수층이 다른 실업팀에 비해서 두텁질 못하다 보니깐 근본적으로 성적이 좋을 수 없었지요. 팀 운영 자체에 의의를 두는 셈이었죠. 그러다보니 항상 다른 은행팀 간에 꼴지 떠넘기기가 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런 팀에서 뛰다보면 의욕이 없을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그런 강팀을 상대로 ‘한 번 이겨보자’는 오기도 많이 발휘됐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농구대잔치에서 강 팀을 제법 잡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저 같은 경우는 그래도 한국은행에서 득점을 거의 책임지고 있었잖아요? 그러니깐 당시에 한 가닥 한다는 수비수들은 전부다 나한테 붙는 거에요. 그러니깐 몸이 성할 수가 없었죠. 슛을 제대로 쏠 수도 없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선수생활 하면서 참 힘들었어요. 사실 그 당시 득점을 많이 하는 선수들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반칙도 정말 많이 했거든요. 우리 추 감독님도 선수로 뛰었을 때 그런 경험 많았을 것 아니에요?(웃음)
예전에 선수 시절 녹화해놓은 중계를 집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어요. 당시 삼성전자에 감독으로 오래 계셨던 김인건 감독님이 내가 득점을 너무 많이 하니깐 작전 시간에 선수들을 불러 놓고, “저 쪽(한국은행)은 오동근이만 막으면 되는데 왜 그걸 못하냐?”고 선수들을 호되게 질책했던 것도 기억이 나네요. 물론, 저도 제 몫을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죠.
순탄치만은 않았던 은행원으로의 ‘제 2의 삶’
추> 은퇴 이후 은행원으로 뛸 수 있었던 것 이외에 은행팀만의 특별한 특징이 있었나요? 그리고 은행원으로의 출발이 순탄치 않았을 것 같은데요?
오> (잠시 생각에 잠기며) 다른 팀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팀이 가장 독특했던 것은 오전에 훈련을 하게 되면, 오후에 실제 은행 업무를 봤다는 거에요. 쉽게 말하면, 우리는 ’1인2역’을 하는 셈이죠. 지금 직장인이면서 다른 운동하는 선수들이 있듯이 우리 역시 엄연히 말하면 은행원이면서 농구 선수였던 겁니다.
선수 시절만 생각해보면, 정말 그런 활동이 힘든 것도 없지 않았죠. 그런데 막상 또 은퇴를 하고 한국은행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다보니 그 때의 그런 일들이 참 도움이 됐어요. 당장 은퇴도 대리 진급시험 때문에 한 것이니깐요.(웃음)
운동만 하던 사람이 이런 은행 조직에 들어와서 얼마나 처음부터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어요? 처음에 진급시험 칠 때는 정말 힘들었죠. 그런데 운동 선수 특유의 근성이 있잖아요? ‘내가 일반 은행원들보다 업무적인 머리는 떨어지더라도, 그들이 한 번 보고 아는 것을 나는 두 번 세 번 보자.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부지런을 떨자’는 마음가짐으로 근성을 가지니깐 또 좋은 결과도 만들어 졌죠.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운동선수 출신’이라고 탐탁지 않게 보던 직장 상사들이나 동료도 하나 둘 마음을 열어주고 인정을 해주더라고요. 농구공을 버리고 은행원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추> 서울을 떠나셔서 부산이라는 새로운 곳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계신데요. 부산이라는 곳은 어떤 것 같으세요?
오> 정말 나도 지금 수영구 민락동(광안리 근처)에서 살고 있지만, 부산이라는 곳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사실 서울에 있을 때는 그런 점을 몰랐었는데, 왠지 삭막하고 그런 느낌도 있잖아요? 물론 부산도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워낙 투박해서 적응에 애를 먹었죠. 하지만 지내다 보니깐 여기는 정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부산에서 사는 게 너무 좋습니다. 지금도 금융감독원에서 서울 쪽으로 올라오라고 하는데, “1년만 더, 1년만 더” 라고 하면서 미루고 있어요.
추> 일반적으로 본인이 운동을 하면 자제분들도 운동을 시키던데요?
오> 그렇죠. 나도 아들이 하나 있는데 지금 캐나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어요. 운동보다는 공부 쪽으로 더 관심이 많아서 아버지가 된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고 있는데, 내심 운동을 시키고 싶은 생각도 있죠. 내가 못했던 것을 아들이 이루어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그런데 이 녀석이 학교에서 보니깐 농구를 곧잘 하는가 보더라고요. 이미 그 대학에 있는 농구팀 선수들과 견줄 수 있는 그런 실력을 가졌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본인이 그렇게 운동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특히 상대적으로 외국은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운동을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무래도 조직력을 중시하는 스타일에 잘 적응할지도 부모 입장에서는 걱정스러운 게 사실이죠.
추> 은행원으로 성공한 삶을 살고 계시지만 현직 복귀에 대한 꿈은 없으신지요?
오> 당연히 있지요. 왜 그런 생각이 없겠어요?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아마 농구를 했던 농구 사람들이라면, 상당수가 그런 꿈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 역시 마찬가지고요.
저에게도 아마추어 팀에 지휘봉을 잡을 기회가 있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인연이 닿지를 않았습니다. 비록 금융권에서도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현장에 있는 친구나 선후배들이 부러운 것은 사실이에요. 농구 선수 출신이라는 게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항상 마음 한 구석에는 지도자가 되고픈 꿈이 있죠.
지금은 최명룡 감독님이 한양대를 이끌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후덕한 인품에 능력까지 갖춘 분이라 모교를 잘 이끌 것으로 생각 됩니다. 비록 먼 발치에서라도 모교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한국 농구 발전을 위한 제언
추> 요즘 프로 농구 농구나 후배들 농구 하는 걸 보시면 느끼는 생각은 없으세요?
오> 저도 연고지에 부산 KT가 있다 보니깐 2009~2010시즌에 몇 경기를 보러 갔었어요. 자주 가지는 못하고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외국인 선수들이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그런 선수들의 존재감 덕분에 다른 선수들이 배우는 것도 있겠죠. 그렇지만 일단 한국 센터들이 좀처럼 경기에 뛸 수 없잖아요? 그러다보니 아시아에서도 좀처럼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고요.
비록 출전에 제약을 두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국내 선수의 비중을 더욱 더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농구가 경쟁력을 얻기 위해서는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선수들이 출전 기회를 더 많이 잡아야 해요. 외국인 선수들에 의한 선진 농구의 습득은 그 다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추> 끝으로 바스켓코리아 독자들께 한 말씀 드리신다면?
오> 아마 농구 팬들 중에서 젊은 분들은 제 이름이 생소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현역 시절에 열심히 했고, 지금은 농구계를 떠나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농구 선수였던 시절이나 금융계에서 사는 지금 모두 보람된 삶이고요.
앞으로도 농구라는 스포츠 많이 사랑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저 역시 비록 자주 찾지는 않더라도 농구장 자주 찾고, 농구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이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바스켓코리아가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저 역시 예전 선수 시절을 회상할 수 있어서 의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저 말고도 다양한 분야에 계신 농구인들을 많이 바스켓코리아에서 찾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직장 동료가 바라본 오동근 팀장은?]
“오동근 팀장님과 근무 한 기간은 약 10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운동 선수 출신이라고 해서 업무적으로 약간 아쉬운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예전에 국가대표로 뛰셨던 오동근 선수가 우리 오동근 팀장님임을 알고 많이 놀랐습니다. 저 역시 직장과 거주지는 부산이지만, 연세대학교 출신으로 농구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
저희 팀장님은 무엇보다도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팀원들을 챙겨주고, 능률을 높여주는 데에 있어서 정말 탁월하신 것 같습니다. 업무 능력 역시 뛰어나시고요. 역시 국가대표는 아무나 하는 타이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본인의 인터뷰는 물론이고 직장 부하 직원의 인터뷰가 끝난 이후 오동근 씨는 바스켓코리아에서 출력해 간 예전 신문 스크랩을 보면서 잠시 상념에 잠겼다. 때로는 본인도 모르는 기록이 기사화 된 신문 프린트를 보고는 “내가 이런 기록도 세웠었나?”라고 반문하는 등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특히 지금은 일선 은행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은 감독 서비스 팀장으로 살고 있지만, 본인의 현역 시절은 물론이고 농구 이야기가 나올 때면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 그를 봤을 때부터 준수한 이목구비 덕분에 왜 그가 ‘원조 오빠부대’라는 수식어가 붙었는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지만,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농구가 자리잡고 살아 숨 쉬는 농구인 임을 알 수 있었다.
농구 선수나 은행원으로써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오동근 팀장의 앞길에 앞으로도 축복이 가득하길 바스켓코리아가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오동근씨 주요 프로필]
- 1981년 한국은행 농구팀 입단.
- 1983년 점보시리즈 3차 대회 득점왕 및 시즌 BEST 5
- 1984년 국가대표 선발
- 선수시절 통산 농구대잔치 2,029점 기록(당시 이충희, 김현준, 최철권, 허재에 이은 5위에 해당)
- 1990년 코리안 리그에서 은퇴한 이후 한국은행 발권부 출납과 근무 시작
- 현 금융감독원 부산지원감독서비스팀장으로 재직.
바스켓코리아 / 인터뷰 진행 추일승, 사진 박영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