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人] 고광헌 한겨레신문사 사장

2010/06/7 by   ·   No Comments

농구인 후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농구는 내 삶의 기본 가운데 기본”

고광헌 사장 / 언론인 시인 민주화운동가 교육자 농구선수

고광헌 한겨레신문사 사장의 이력을 보면 “왜 이 사람이 농구인인가?”라는 의문이 든다. 국내 유일의 정론지 한겨레신문 사장, 시인, 교사, 기자, 민주화운동처럼 그의 이력을 따라 다니는 이런 단어들에서 쉽게 농구와의 친연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한때 촉망 받는 농구선수로 고등학교와 대학에 스카웃돼 청춘의 땀을 흘린 선수였다. 아직도 그와 함께 농구장을 누비던 동료와 선후배 지인들이 농구현장에서 지도자와 행정가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농구선수 시절 맺은 농구인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이어가고 있다. 그의 인생행로는 특이한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수많은 장애를 뛰어넘어야 되는 쉽지 않은 삶에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늘 일정한 성취를 이뤄가고 있는 농구인 고광헌을 만났다.

“중학교 때 키가 180센티가 넘었습니다. 지금 청소년 평균키에서 살짝 넘는 수치이지만 당시로는 거인축이었어요. 키가 크다는 소문을 듣고 운동부가 있는 서울의 고등학교에서 데려가려고 시골까지 와 부모님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서지 못했죠. 그러다 서울의 고교진학에 실패하고 재수를 하던 중 정부 주최 스포츠 꿈나무 선발대회에 나가 뽑히면서 선수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운명이죠 뭐.”

그는 중학교 시절 비쩍 마른 키 큰 소년이었다. 서정주와 한하운의 시를 좋아했고, 빈혈이 있어 한 낮의 뙤약볕을 싫어했다. 그런 그가 운동선수로 진로를 바꾼 것이다. 그는 운동선수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스포츠 꿈나무 최종 선발은 태릉선수촌에서 한달 가까이 합숙훈련을 시킨 뒤 뽑았습니다. 그때까지 체육활동다운 활동을 해 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매일 숨이 꺽꺽 차는 죽음의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꿈나무’들은 사실상 선수들이었는데, 그들과 제가 똑같이 뛴 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었죠. 하지만 참고 잘 견뎌냈고, 특히 순발력과 점프력에서 발군의 능력을 보여줬습니다.”

꿈나무 최종선발이 되기 전까지 그는 전국적으로 3600여명이 지원한 1차 시군선발대회와 2차 도 선발대회를 통과한 뒤 타 지역에서 자격을 얻은 35명의 동료들과 1970년 11월말 태릉에 입촌했다. 그런데, 태릉선수촌은 그때나 지금이나 국가대표와 상비군만 들어가는 곳이다. 그리고 많은 운동종목 중에 왜 농구를 선택했을까. 

“아마, 그때의 꿈나무들이 국가대표급으로 성장할 것으로 보고 당국이 그렇게 결정했을 겁니다. 실제로 그 뒤 많은 선수들이 국가대표로 활약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농구를 선택하게 됐습니다. 당시 대표급 지도자들이 실기지도를 하면서 소질을 파악하고 진로지도를 했는데, 배구로 유명한 대신고 출신 감독은 배구를, 농구로 유명한 휘문고를 지도한 감독께선 농구를 권유했습니다. 체육회의 한 간부는 자신의 모교 양정고 진학을 추천했습니다. 실제로 양정고에 가서 보름 가량 합숙훈련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홍대부고를 졸업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농구를 하기로 정한 뒤 배구에의 미련은 버렸습니다. 최종선발이 됨으로써 경복이나 양정 휘문과 같은 학교에 진학이 가능해졌습니다. 이들 학교가 모두 농구 명문들이었구요. 홍익으로 진로를 정한 것은 순전히 선수촌에서 같은 방을 쓴 김종필 형(당시 홍대부고 2)과의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1개월 가량 한방을 쓰면서 저를 많이 붙잡아 주었습니다. 둘 다 모두 시골 출신에다 무엇보다 책을 좋아하는 문학소년이었습니다. 고된 하루가 끝나고 형이 낭독해 주던 자작시를 듣는 것은 제겐 경이로움이었습니다. 열여섯 촌놈에게 형의 시어들은 저의 문학적 환상을 활짝 열어 젖히는 열쇠였습니다. 그 인연이 저를 홍대부고로 이끈 셈이지요.”

초중학교 시절 운동선수 경험이 전혀 없던 그가 구기종목 가운데서도 가장 힘든 것으로 알려진 농구선수생활을 어떻게 받아드리고 실천에 옮겼을까. 본격적인 선수생활에 어떻게 적응했는지 궁금했다.

“정말 체력적으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내게 기존 선수들과 페이스를 맞추어 가며 하는 훈련이 지옥 같았습니다. 양정고에 가서 반짝 합숙을 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겨우 참아가며 훈련을 마친 뒤 체육관 사무실에 갖더니 물이 가득 차 있는 노란색 대형 주전자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시원하게 잘 마셨습니다. 두 번째 컵에 물을 따르는 순간 마른 목이 적셔지면서 죽어있던 미각이 살아 났습니다. 석유였던 거죠. 정말 어렵게 그 시절을 통과했습니다.”

그는 본격적으로 농구를 시작한 지 3개월만에 경기에 나가고, 1년 만인 2학년때부터는 붙박이 베스트 멤버로 뛴다. 3학년이 돼서는 주장을 하게 되고, 이 때 그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을 실천한다. 하지만 그의 몸은 그가 모르는 사이에 또 하나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결핵균이 침투해 있었던거다. 짧은 기간에 너무 많이 육체를 동원한 탓일 것이다.

“열여섯살 고1때부터 농구를 하기 시작해 경희대 3학년 때까지 선수활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경희대 입학 당시 신체검사에서 폐결핵이 발견돼 불합격 대상자가 됐습니다. 당시 조영식 총장의 배려로 뒤늦게 합격증을 받을 수 있었고, 의료원에서 정기치료와 약을 먹으며 선수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함께 운동을 했던 선후배들 가운데 최부영 현 경희대 농구감독과는 같은 하숙집에서 생활했지요.”

지금 기준으로는 어림없는 얘기지만 당시엔 이런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많은 선수들이 자신도 모르게 결핵을 앓았다는 것이다. 약물치료를 받으며 하는 선수생활은 어땠을까? 그리고 그가 말하는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자랑스런 일이란 뭐였을까?

“조금 무식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약물에 대한 믿음도 컸구요. 정기적으로 체크를 해보면 악화되지 않았고, 이를 빌미로 열심히 선수생활을 했지요. 아, 지금도 그건 자랑하고 싶습니다. 저희가 운동하던 70년대엔 매일 매를 맞았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 3번 이상 매타작을 당하기도 했지요. 고참부터 학년별로 줄줄이 이어지면서 매를 때리던 시절이었습니다. 늘 부당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저항은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견디면서 희망 하나를 품었습니다. ‘고3이 되면 주장이 되어 반드시 매를 근절 시켜야겠다’는 다짐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실천했습니다. 한 번도 몽둥이를 들지 않았습니다.”

경희대학교에서 농구를 그만둔 뒤의 삶은 더 변화가 많다. 그건 지난 6년여 동안 농구에 절대적 투신을 한 만큼이나 전환하기까지 어려움을 동반했다. 좌절과 회한, 미련은 그를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게 하기도 했다.

“중도에 포기하게 되면서 좌절이 심했습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선수로서의 희망이 사라지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감이 다가온 거죠. 그 때까지만 해도 농구선수 이외의 다른 분야에의 도전은 생각해보지 못했거든요. 똑같진 않지만 지난 겨울올림픽 때 쇼트랙에서 스피드스케이팅으로 바꾼 뒤 깜짝 금메달을 딴 이승훈 선수를 보고 놀랐습니다. 예선탈락의 좌절을 딛고 전향을 해 큰 일을 해냈잖아요. 저는 맨날 술먹고 울다 쓰러졌습니다. 그러면 친구가 업어 하숙집에 데려다 주는 날이 반복됐습니다. 방황이 이어졌습니다.”

방황의 끝은 3학년 겨울방학이 다가오면서 시작됐다. 몸이 많이 망가지자 예의 그 종필이 형이 자기의 시골 고향에 데리고 갔다. 산골에 유폐시킨 뒤 꿩을 잡아 먹이고 몸을 추스르게 도왔다. 신기하게도 이듬해 병원에 갔더니 결핵은 자연치유가 된 상태였다. 다시 한번 전환기를 맞는 것이다.

“너무 좌절을 했기 때문인지 몸이 회복됐어도 농구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농구와 완전히 벽을 쌓기로 단단히 맘 먹었습니다. 하루 1500개의 슛 연습을 하던각오로 새로운 길을 가보자고 맘 먹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워낙 문학쪽에 관심이 많아 문장론이나 시창작, 수필론 등 황순원 조병화 서정범 교수들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수강신청을 받아 주지 않으려는 황순원 교수와의 샅바싸움은 지루했습니다. 결국 학생인 내가 이겼고 저는 문학과 문학인의 자세에 대한 많은 공부와 영감을 얻게 됐습니다.”

그 뒤 80년대 고 사장은 대학원에 진학해 국어교육을 전공하기에 이르고, 이즈음 그는 문단에 공식 등단한다. 8, 90년대에 쓴 고 사장의 시에는 운동선수들의 애환을 시화한 작품이 많다. 아마 스포츠라는 분야를 문학의 한 장르로 다룬 것은 고 사장이 처음일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다양한 독서를 하면서 승리지상주의 스포츠의 폐혜에 대한 객관적 접근이 가능할 정도가 됐습니다. 아주 기초적인 사회학 공부만을 한 시각으로 봐도 당시 우리나라의 스포츠 현실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서울올림픽 전에 출간한 평론집 <스포츠와 정치>에 운동선수를 비인간화로 몰아세우는 배경에 국가주의 스포츠와 승리지상주의가 있다는 것을 다뤘습니다. 또 스포츠 상업주의의 문제를 제기하는 한편 스포츠를 지나치게 정치화의 도구로 활용하는 권력의 문제를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모두 농구선수로서의 경험이 그같은 새로운 시각과 논점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포츠와 농구 예찬론자이다. 그는 스포츠, 쳬육이야말로 근대이후 현존하는 가장 바람직한 교육프로그램이라고 믿고 있다. 몸을 던져 앎에 이르는 교육이 스포츠인데, 그 과정에서 내면화되는 미덕과 가치는 관념적 지식을 수용하는 방식의 타 교과목과의 교육적 효과와 차이가 많다고 확신한다. 그는 시 쓰는 것부터 교사, 회사경영, 민주운동 등 모든 과정에 농구선수를 하면서 체득한 가치와 미덕들이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구체화된다고 강조할 정도다.

“농구는 내 인생의 기초 중의 기초입니다. 농구와 스포츠 정신이 체육관 밖에서의 내 삶을 지탱해 줬고 이끌어 왔습니다. 인생은 늘 어려움과 장애로 가득한 고난의 길입니다. 이처럼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좌절하지 않고 하나하나 극복해나가는 능력을 저는 농구장에서 배웠습니다. 용기, 자신감, 모험심 같은 미덕은 주어진 상황에 대한 수용에서부터 진행, 결과까지 두려움 없이 나아가도록 합니다. 반면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도 침착함과 인내, 배려와 같은 미덕이 이를 극복해 나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집단적 조화를 이루면서 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때 최고의 결과가 나오는 농구의 생리 속에 그런 가치가 다 들어있다고 믿습니다. 농구는 제게 한때 좌절과 패배감을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결국은 제 인생을 이끌어 줬습니다. 한겨레 입사이후 기자에서부터 여러 보직을 거쳐 지금 대표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도 그 원동력은 농구가 저에게 준 미덕에서 나왔다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후배 농구인들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다.

“사람은 다양한 경험과 그에 걸맞는 소양을 쌓아야 합니다. 농구선수는 농구에 우선순위를 두고 최선을 다 해야겠지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겁니다. 인생의 긴 행로에서 보면 농구선수로서의 삶은 너무 짧은 겁니다. 나머지 삶이 중요하겠지요. 인생은 시간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대부분 운동선수에게 시간은 젊은 시절을 말합니다. ‘젊은 시간’과의 투쟁을 하는 게 운동선수지요. 하지만 강력했던 육체도 시간의 도전 앞에 허물어집니다. 팽팽했던 근육 역시 세월 앞에 무력해집니다. 우리는 모두가 개인이며, 가장이고 남편이며 아들입니다. 직장인이고 선배며 또한 후배입니다. 이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개인의 역할입니다. 그러니 가능하면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필요한 소양을 쌓고,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특히 졸지에 선수생활을 접은 후배들은 먼저 자신에게 또 다른 잠재된 능력이 있고 충분히 그것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선수의 삶은 폭발적이고 열정적입니다. 몸의 능력이 가장 출중할 시기에 몸을 통해 가치를 구현해 내는 것, 그게 운동선수죠.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 반드시 인생의 전환점은 옵니다. 자신만이 가진 잠재력을 이끌어 내야 합니다.”

고 사장은 운동선수라면 ‘지금, 바로의 정신’을 강조했다. 늘 최고의 몸상태로 몰입할 것을 주문했다. 딴 생각하지 말고 기술, 체력적으로 익히고 연마하는데 올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것 이상 중요한 것은 운동시간 이외의 시간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별로 하는 일없이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책을 읽고 깊이 사유하며 농구와 삶을 즐기되 가능하면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함께 교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스켓코리아 오경진 편집장 / 사진 오성두

[고광헌은 누구인가?]
고광헌은 1955년 정읍시의 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 곳에서 지금은 없어져버린 남성분교와 정읍중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 시절 높이뛰기 선수 경험이 있는 분이었고, 어머니는 근면, 성실한데다 무척 사리가 밝아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70년 문교부 주최의 스포츠꿈나무선발대회에서 3,600여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최종 12명의 합격자에 포함되면서 인생의 항로가 바뀐다. 중학시절엔 문인 선생님이 많이 재직한 덕분에 문학적 소양을 기르고 책을 가까이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줬다. 농구명문 홍익사대부고와 경희대에서 농구선수로 뛰었으며, 같은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시인>지에 조태일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했다. <5월시> 동인. 1979년 9월부터 6년간 선일여고에서 체육을 가르치며 시와 스포츠 평론활동을 했다. 85년 <민중교육지사건>으로 체포돼 파면됐다. 해직 뒤 민교협 사무국장을 맡고 있던 19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기관지 <국민운동>을 편집했다. 87년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이듬해 국민주신문 <한겨레>가 창간되자 기자로 변신했다. 한겨레 입사이후 체육, 사회부 기자를 거쳐 민권사회부 차장, 전국부장, 민권사회부장, 문화부장, 체육부장, 편집부국장, 광고국장, 사장실장, 판매이사, 총괄상무, 전무에 이어 2008년 기자와 사원들의 직접투표로 대표이사에 선출돼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시집 <신중산층교실에서>와 동인시집 <그래, 우리가 또다시 만난다면> <5월> 등과 평론집 <스포츠와 정치>, 논문집 <심훈의 시 연구> <민중교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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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人] 고광헌 한겨레신문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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